첫 중간고사
중간고사
오늘 첫 중간고사를 보았다.
분명 몇달 전에 난 졸업가운 입고 학사모도 던지고 시험공부하는 친구들 놀려주고 있었는데... 내 인생에 또 중간고사가 찾아왔다.
10월 8일이 시험인데, 10월 1일부터 5일까지 GHC에 참여하느라 플로리다에 가 있었고, 플로리다에서 틈틈히 공부를 할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저녁까지 꽉꽉 차있는 스케줄에 치여 어림도 없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멀미와 싸워가며 논문 하나를 읽은 게 플로리다에서 할 수 있는 시험공부의 전부였다.
더 최악이었던 건, 플로리다에서 돌아오기 전날부터 목이 따끔거린다 싶더니, 결국 돌아오는 날에는 심한 몸살 감기를 가지고 왔다.
다행히 집에 약은 있었지만, 약을 먹으면 약기운에 졸음과 피로가 머리를 짓눌러서 도저히 시험공부를 할수가 없었다.
결국 3일동안 약도 못먹고 비타민과 홍삼을 챙겨먹으면서 거의 사경을 헤메면서 시험공부를 했다.
다행히 시험이 한과목밖에 없긴 했지만, 시험범위가 너무 어마어마했다.
무려 논문 17개가 시험범위인데, 절대 3일안에 읽을 수 있는 양이 아니라... 읽는데까지 읽고, 나중에는 그림이랑 인트로덕션/디자인만 훑어보다가, 마지막에는 '그래, 박사 학점은 하나도 안중요하댔어' 하는 합리화로 마무리했다.
결국, 인생에서 처음으로 시험범위를 다 커버하지 못한 채로 시험을 치러 들어갔다.
중고등학생때는 열심히 선행을 해 가면서 몇년 후에 칠 시험을 미리 준비했고, 시험 기간 2주전부터는 모든 걸 정리하고 외우고 본 걸 또 보는 공부를 했다면, 대학생때는 시험 며칠전부터 몬스터와 핫식스로 밤을 지새우며 시험 범위 1회독과 피피티 1회독을 겨우 끝내고 들어갔었다. 이제 대학원에 오고 나니... 시험범위를 1회독 하는 것 조차 쉽지 않다.
영어
시험공부를 하다보면 다시 밀려오는 것이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와 자괴감이다.
논문 하나 읽는데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리는데, 영어가 모국어인 애들과 과연 경쟁이 될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내가 읽고있는 것이 이해가 안되는게, 영어 때문인지, 부족한 백그라운드 때문인지, 하루종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열 때문인지, 답답한 마음으로 가득찬 3일을 보냈다.
영어로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한글로 글을 쓰는 것에 대한 즐거움과 소중함을 새삼 느끼고 있다.
단어마다 묘하게 다른 그 늬앙스와 느낌, 내 기분과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적당한 단어를 고심해서 골라 문장을 완성할 때 오는 그 행복감이 있다. 독서라고는 중고등학생때 생기부에 들어가야 하는 책을 억지로 읽은 게 마지막 기억이고, 일기라고는 초등학교때 방학숙제를 하루만에 일기예보 찾아가며 몰아쓰던 게 마지막인데, 이렇게 스스로 일기를 쓰고 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면서도 우습다.
'심한 몸살 감기로 사경을 헤메고 있다' 라는 문장을 친구에게 보낼때는, 내가 지금 감기에 걸려서 열이 심하게 나 힘들다는 사실과, 그 사실을 과장하는 데에서 오는 약간의 투정과 개그가 섞여있지만, 이걸 외국인에게 영어로 표현할 것을 생각하면 "I was very sick" 혹은 "I had very bad cold last few days"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이게 원어민에게 어떤 느낌으로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정보전달' 그 이상도 이하의 의미도 없는 딱 그 정도의 느낌이다.
친구와 카톡을 할 때에도, 'ㅋㅋ'와 'ㅎㅎ'의 느낌이 다르고, 'ㅋㅋㅋ' 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의 느낌이 다르고, '넵', '네', '네엡~' '네넹' '네 알겠습니다', '넵넵' 의 느낌이 다른데. 단순한 '와 부럽다' , '부럽...' , '어 그래 부럽네', '하나도 안부럽다ㅋㅋ' , 'ㅋㅋㅋ부럽ㅋ' 도 상황에 따라, 점과 ㅋ의 개수에 따라 묘하게 달라지는 느낌이 있다.
한글로 글을 쓸 때는 내가 쓰는 문자가 상대방에게 어떻게 읽힐지, 어떤 이미지를 가질지, 이 글 너머에 있는 '내'가 어떻게 표현될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되지만, 영어로 글을 쓸 때는 그냥 단순히 '내가 하려는 말이 잘 전달되는지', '문법은 맞는지' 를 챙기는것조차 쉽지 않다.
논문을 읽을 때, 저자가 신중하게 골랐을 그 단어들의 느낌과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싶고,
대화를 할 때, 못알아들었으나 알아들은척 웃으며 오케이오케이 하는게 아니라, 상대방이 하는 말을 오롯이 알아듣고 그에 적당한 대답이 하고 싶고,
글을 쓸 때, 내가 가진 생각들을 정확한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하고 싶다.
언어가 부족하니 내가 가진 생각들은 내 머릿속에만 갇혀 표현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일수가 없어서, 내가 표현하고 이해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얕은 수준의 공부를 하게되는 현실이 답답하다. 스펀지처럼 쭉쭉 흡수하며 얼른 배우고 싶은데, 언어의 장벽이 내가 배우는 수준에 상한선을 만들어 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이게 한글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되는 순간이 얼른 사라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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