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 생활
처음으로 만년필을 쓰기 시작한 건 열세살즈음이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졸업선물로 무엇을 받고싶냐는 부모님의 물음에 내가 골랐던 것이 EF닙의 세일러의 14K 프로피트 스탠다드 만년필이었다. 당시에는 나도 그렇고 주변 친구들도 그랬고, 시그노나 하이테크같은 0.28 의 얇은 볼펜들을 주로 썼기 때문에 가능한 세필로 고르려다 보니 저걸 골랐던 것 같다. 무슨 바람이 들어 갑자기 만년필에 꽂혔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워낙 샤프/볼펜류의 필기구들을 좋아하기도 했고, 그러다보니 결국 그냥 번쩍번쩍한 만년필의 자태가 멋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중고등학교 내내 그 한자루의 만년필을 매일같이 사용했었다. 사물함에 늘 병잉크가 쟁여있었고 필통에는 컨버터와 카트리지를 들고 다녔었더라지. 심지어 수학문제를 풀때조차도 만년필을 사용했었고 노트 정리도 전부 만년필로 했었던 기억이 난다. 제트스트림이나 하이테크 같은 편하고 종이도 안 타는 좋은 펜들이 많은데도, 굳이 충전마다 손에 잉크가 묻고 종이에 따라 만년필 잉크가 뒷면에 배겨나오는 불편함을 감수해가면서까지도 만년필의 갬-성을 버리지 못했다. 선생님들도 수학문제는 좀 샤프로 풀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했었는데 난 꿋꿋하게 교과서에도 쎈 문제집에도 시커먼 잉크를 묻혀가면서 만년필로 문제를 푸는 고집을 부렸었다..
세일러 만년필 말고도 저렴한 버전의 LAMY 만년필로 포인트 필기를 했고, 캘리용 로트링 아트펜으로 노트필기의 타이틀을 썼었던 것 같다.
그러다 대학에 들어가고, 과외를 해서 큰(?) 돈을 벌고 나서 두 번째 만년필을 장만했다. 기존에 쓰고있던 만년필도 너무 애정이 가득했기 때문에 다른 브랜드로 넘어갈 생각은 하지도 않았었고, 그냥 지금꺼보다 조금 더 업그레이드가 된 제품을 사고싶다는 생각에 고른 것이 세일러의 21K 프로기어 제품이었다.
이전 제품보다 무게도 크기도 늘어나고, 닙 크기도 커지면서 21K 투톤 골드로 업그레이드가 되었다. 사진엔 보이지않지만, 뚜껑엔 번쩍번쩍하게 금박으로 이름까지 각인이 되어있다.
그런데 대학을 가고 나니 사실 펜을 쓸 일이 현저히 줄었다. 줄었다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거의 사라진 수준이었다.
중고등학생 내내 늘 두툼한 필통에 수십개의 색색펜들을 들고 다니는 문구덕후였는데, 대학동안은 필통은 커녕 볼펜 한자루 가방에 대충 들고다녔던 적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심지어 난 1학년때부터 동기 중 유일하게 태블릿으로 수업필기를 하는 얼리어답터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자기만족으로 샀던 이 펜의 용도는 그렇게 알고리즘 문제풀 때 연습장에 끄적거리는 용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3학년이 되고 학부연구생을 시작하면서부터는 PS 공부도 접었기 때문에 그조차 하지 않게되었다. 그 후 몇년간을 만년필 뚜껑도 안열어 보고 살았는데, 미국에 올 때도 과연 내가 이걸 쓸까 싶으면서도 괜히 두고오긴 아까운 마음에 다 챙겨와 2년가까이 서랍에서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았었다.
그런데 최근에 갑자기 다시 만년필에 대한 관심에 불이 붙었다...가 딥펜으로 관심이 또 넘어가버렸다.
구구절절 스토리가 길었지만, 결론은 요즘 copperplate 필체를 연습하는 데 빠져있다는 거다.
원래는 만년필로 멋들어진 필기체가 쓰고싶어서 유튜브를 보기 시작했었는데, 그러다가 갑자기 예쁜 글씨체에 꽂혀서 배우려다 보니.. 만년필이 아니라 새 장비들이 필요했다. 오블리크 홀더라던지, 펜촉이라던지, 잉크라던지 하는 것들..
만년필은 오래 사용했어도 딥펜은 이전에 써본적이 없어서 더 재밌는 것 같다.
필압에 따라 획 굵기가 확연히 달라지는 게 만년필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쓰는 재미가 있다.
분명 시작은 그냥 글씨체 교정이었는데...
딥펜을 쓰다 보니 없던 잉크 욕심이 새록새록 생겨나고, 쓰다가 뾰족한 딥펜 촉에 종이가 긁혀서 잉크가 번지고 튀는 걸 보니 또 종이가 사고싶고... 연습하기 좋게 사선으로 가이드가 그려있는 패드도 있으면 편할 것 같고, 교본도 사고 싶고...
글씨쓰면 마음이 차분해진다더니 웬걸 점점 물욕만 늘어가고있다.
지금도 내 집으로 열심히 달려오고 있는 택배들이 한가득이다.
수미잉크도 주문했고, 교본도 하나 오고있고, 연성플렉스 만년필도 하나 오고있다..
그래 역시 인생은 Maximalism!
정작 글씨는 초반이랑 비교했을 때 영 안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