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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독서

사실 마지막으로 독서를 했던 게 언제였는지 까마득하다. 어릴 적부터 독서보다는 게임을 더 좋아했고, 독후감 쓰기는 늘 가장 싫어하던 방학 숙제 중 하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필요에 의해 억지로 읽었던 필독 도서나, 공부를 위해 읽던 두꺼운 전공책들을 제외하면 자발적으로 내적 동기에 의해 책을 집어드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친구로부터 연말에 책 선물을 해줄테니 원하는 책을 한 권 골라보라는 연락을 받았다. 유학을 시작하고 여러 모로 마음이 불안해서인지, 코로나로 인해 망가진 생활패턴과 정신 건강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언제부턴가 새로운 취미가 필요하다고 느끼던 참이었다.  마침 박사과정 동기들이 술자리에서 테드 창 작가를 언급했던 것이 머릿속에 순간 떠올라, 잘 알지도 못하지만 이 책을 고르게 되었다. 

E-book 으로 책을 다운받고 목차를 펴보고 나서야, 이 책이 하나의 장편 소설이 아니라 여러 편의 단편소설들이 모아있는 단편모음집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책 한권을 잡고 끝까지 읽기가 부담스러울 법 한 일상을 보내고 있어, 그러한 점이 오히려 내게 더 잘 맞았던 것 같다. 자기 전, 혹은 커피를 마시면서 단편을 가볍게 하나씩 마치는 재미가 있는 책이었다. 모든 작품들이 매우 취향에 잘 맞았고 만족했지만, 그 중 특히 몇몇은 그 세계관이 너무 정교해서 며칠간을 머릿속에서 맴도는 작품들이 있었다. 그러한 작품들만 골라 아래에 생각들을 적어보고자 한다. 

 


 

이 아래는 책의 스포가 있으니 조심!

 


이 책에 실린 두 번째 단편이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더욱 이 작가의 소설이 나와 굉장히 잘 맞는다는 것을 인정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미사여구 없이 깔끔한 묘사가 마치 논문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 작품의 세계관은 가상의 기계인간만이 존재하는 세상으로, 작품 속 세상의 기계인간들은 살아가기 위해 전기가 아닌, 공기를 소비한다. 다만, 인간처럼 대기에서 호흡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매일 가슴에서 두 개의 빈 허파(공기탱크)를 꺼내 공기를 가득 채운 새 허파로 교체하는 방식을 통해 공기를 공급받는다. 마치 배터리를 교체하는 것처럼 말이다. 공기가 모두 소모된 빈 허파들은 공기 충전소에 가져가면 충전된 허파들로 교체받을 수 있다. 

 

이 작품의 화자 역시 그런 기계인간 중 하나로, 기억이 뇌에 어떻게 저장되는가에 대한 탐구에 몰두한 해부학 연구자였다. 기계인간이 치명적인 사고를 당해 두개골이 파손될 경우, 갈가리 찢긴 금박형태의 잔해가 발견되는데, 주인공은 이 금박과 기계인간의 기억 메커니즘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스스로를 해부하기로 결정한다. 특히, 어느 날 부터인가 세상의 시간이 조금씩 빠르게 흐르는 기현상이 발견되었는데 주인공은 이 해부실험을 통해 그 원인 또한 찾을 수 있을거라고 기대한다.

 

해부를 위한 실험 설계 과정도 굉장히 흥미로웠는데, 주인공은 스스로의 뒤통수를 열고 그 내부를 세밀하게 분해하기 위해 프리즘과 조작장치들을 설치하고, 일주일간 제 자리에서 꼼짝않고 스스로를 해부할 수 있도록 일주일치의 허파탱크를 모두 관으로 연결해 준비한다. 그렇게 몇날 며칠을 자리에서 해부한 결과, 주인공은 기억이 저장되는 원리를 발견하고, 나아가 시간이 점점 빨라지는 이유를 깨닫는다.

 

흥미롭게도 작품에서 밝혀진 기계인간의 기억의 저장 메커니즘에 대한 묘사는 마치 SSD의 원리와 유사했는데, 투명하리만치 얇은 금박이 공기의 흐름에 의해 가라앉거나 떠오르는 것을 반복하며 펄럭거리고 그 위치로서 정보를 저장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설정은 SSD의 NAND 플래시 메모리가 트랜지스터에 전압이 가해지면서 셀의 비트가 0과 1로 변경되는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가가 CS 전공이라던데 그 때문인가. 금박의 위치는 공기의 흐름에 의해 결정되고, 공기가 흐르지 않는다면 금박은 모두 가라앉기 때문에, 만약 공기가 다해 완전히 멈춰버린(사망한) 기계인간에 다시 새 허파를 장착하더라도 그를 다시 움직이게는 할 수 있을지언정, 그의 기억까지 소생시킬수는 없었다.

 

나아가, 이와 같은 관찰을 통해 주인공은 세계의 시간이 빨라진 것이 아니라, 실은 모든 기계인간들의 뇌가 점점 느려지고 있다는 것을 유추해냈다. 기계인간의 뇌는 공기의 흐름에 의존해 작동하므로, 공기의 흐름이 느려지자 사고도 느려지면서 시계가 더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리고 허파에서 외부로 흐르는 공기의 흐름이 느려졌다는 것은 곧, 기계인간들이 살고 있는 대기의 압력이 점차 커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결국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마치 봉인된 방처럼 닫힌 계이며, 공기충전소는 그 외부로부터 공기를 가져오고 있다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그렇다면 그들이 살아가며 매일 허파 속 공기를 밖으로 내보낼 수록, 그들의 뇌는 점점 더 느려질 것이고, 어느 순간 대기압이 높아져 허파와 평형상태가 되면 모든 기계인간이 제자리에서 멈추게 된다는 종말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이 작품을 읽으며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가상의 SF 세계속에서 해답을 도출해내는 기계인간의 사고과정을 과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굉장히 테크니컬하고 논리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이었다. 평소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특히 타임패러독스나 타임슬립에 관한 주제를 다루는 작품을 볼 때마다- 넘치는 과학적 오류들에 진저리를 치고는 했는데, [각주:1] 이렇게 화나지 않고 평화롭게 읽히는 SF 소설은 정말 처음 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의 상상력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세계관과, 그것을 파헤쳐가는 주인공의 독특한 실험 설계, 기억을 저장하는 뇌의 비밀과 시간의 오류가 궁극적으로 맞물려 함께 해결되고, 나아가 종말이 다가오는 것을 예측하고 그를 피할 수 없다는 것까지 그 모든 과정이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풀려나가는 것에서 작가의 역량이 엄청나다고 느꼈다.

 

인간이 음식을 섭취하는 것은 사실 그 음식에 포함된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정확히는 틀린 것으로, 에너지 보존법칙에 의해 에너지는 새로 생성되거나 파괴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음식을 섭취하는 것은 곧 저엔트로피 형태의 화학적 에너지를 고엔트로피 형태의 열에너지로 발산하는 것으로, 질서를 소비하고 무질서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이와 같은 아이디어를 기계인간을 도입해 공기와 대기압을 통해 묘사하며 소설의 형태로 전달한 것이 굉장했다.

 

소설임에도 마치 과학 논문을 읽는 것 같기도 했고, 논리로 연결된 추리의 단계 끝에 비로소 우주의 비밀이 풀리며 마침내 종말까지 예측하게 되는 스토리는, 과학자로서는 굉장히 흥미로울수밖에 없었던 작품이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

원문으로는 What's expected of us 라는 제목으로, 네이쳐지에 실린 고작 한장 짜리 단편소설[1]이었다. [각주:2]

 

전반적으로 이 작가의 소설은 (1) 과학적으로 거슬림이 없는, 그러나 아직 현실에는 없는 작은 설정 하나와 (2)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일화들 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소설을 읽고 나면 항상 (3) 그렇다면 나는? 을 생각해 보게 된다. 이번 단편에서의 설정은 "버튼을 누르기 정확히 1초 전에 불빛이 반짝이는 작은 장치"로, 소설 속에서는 이를 예측기(Predictor)라고 명칭한다. 불빛이 보이기 전에 버튼을 누르려고 하면 어김없이 그 직전 불빛이 들어오고, 버튼을 누르지 않을 결심을 하고 불빛이 반짝이는 것을 기다리면 불빛은 절대 반짝이지 않는다. 예측기를 속일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1시간 혹은 1년 후의 미래를 알려주는 수정구슬도 아니고, 고작 단 1초후에 내가 이 조그만 버튼을 누를지 말지를 미리 알려주는 장치가 뭐 그리 대단할까 싶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는 곧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가 되어버린다. 끝까지 본 사람은 모두 죽는다는 비디오 괴담이나, 자신의 얼굴을 본 모든 이를 돌로 만들어버리는 메두사처럼, 이 예측기의 존재를 체험해 본 사람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을 결국 믿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선택을 하는 행위 자체를 거부하고 자발적인 행동을 중지함으로서 마치 식물인간과 같은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 한페이지짜리 소설이 참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정말 대단한 작가가 아닐 수 없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잊을 만 하면 열리던 글짓기 대회때마다 도대체 고작 원고지 몇십 장에 대체 어떻게 소설을 쓰라는 건가 싶었는데, 이토록 짧은 글이 이리도 강력한 여운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느껴본 것 같다. 

 

만약 내가 저 예측기를 손에 쥐게 된다면 과연 나도 혼수상태에 빠질것인지를 고민해보게 되었다. 내가 날밤을 새고 하루에 7-8잔의 커피를 마시고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도 열심히 살고자 하는 이유는 이러한 나의 노력이 분명 나의 미래를 바꿀 것이라는 믿음에서 기인한 것이다. 만약 모든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고, 노력을 하는 것도, 딴짓을 하는 것도, 일이 풀리지 않아 우울해하고, 속상해 하면서도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일을 시작하는 것 까지도, 모두 우주의 흐름 속에 정해져 있고, 나는 그저 시간축을 따라 재생되고 있는 것 뿐이라는 걸 깨닫는다면 지금과 같은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이 책에 실린 총 9개의 단편들 중 가장 오랫동안 생각을 하게 만든 작품이다. 얼마 되지도 않는 길이임에도, 거의 일주일을 넘도록 머릿속에서 이 책의 설정이 떠나질 않았다. 

 

이 단편의 설정은 '만약 인간에게 완전무결한 기억이 있다면?' 에서 시작한다. 과학이 발전하다보면 -아니 사실 지금의 과학수준으로도 이미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언젠가는 우리 인생의 모든 순간을 1초도 빠짐없이 영상으로 영구히 기록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날이 올 것이다. 마치 블랙박스처럼, 몸에 장착한 개인 카메라로 자기의 삶 전체를 연속적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이를 '라이프 로그' 라고 부른다. 그러나 블랙박스나 CCTV 가 그렇듯, 사람들은 무언가 특별히 찾고 싶은 과거의 순간이 생겼을 경우[각주:3]에만 라이프로그를 활용하고, 대부분의 기록은 다시는 재생되지 않고 그저 묻혀있을 뿐일 것이다. 

 

여기에 흥미로운 설정이 하나 더 추가되는데, 신제품인 '리멤' 알고리즘은 사용자가 하는 말을 모니터하고 있다가, 과거의 사건들을 언급하면 시야의 좌측 하단에 해당 사건의 영상을 띄워준다. [각주:4] 예를 들어, "저번에 먹었던 치킨집 맛있었는데" 라는 말을 하면, 리멤은 라이프로그에서 관련 영상들을 검색해 최근에 먹었던 치킨집들을 시야에 띄워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의 자연 기억을 대체해 줄 도구로 제시된다. 

 

이 소설은 특이하게도 두 가지의 전혀 관계없는 스토리가 번갈아가며 서술된다. 주인공도, 시대도, 배경도 다른 두 스토리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인간의 기억을 대체해 줄 수 있는 도구를 처음 접하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한쪽의 서사는 앞서 서술한 것처럼 라이프로그와 리멤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가까운 미래의 성인 남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다른 한쪽의 서사는 이방인으로부터 처음으로 '문자'를 배우고 이를 통해 언어를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하는 어린 원주민의 이야기를 다룬다.

 

음성언어를 문자언어로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원주민 아이는 오래전에 들었던 말을 시간이 지난 후에도 정확히 똑같이 다시 되새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중에서 흩어져 사라져버린 소리를 글로 기록해두면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찾아보았을 때, 당시에는 알지 못했던 것을 새롭게 알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미리 글로 적어본다는 것은, 뜻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단어의 배열을 특별히 정교하게 고심하고 다듬어, 이를 잊지 않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글은 음성언어를 기록하기 위함이면서도, 음성언어를 입 밖으로 내기 전에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결정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아이는 글을 배움으로써 단순히 문자를 읽고 쓸 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차원의 사고과정을 할 수 있게 된다. 

 

리멤과 라이프로그를 사용하는 인간은 더 이상 '망각'의 동물이 아니게 된다. 라이프로그는 진위 여부를 밝히는 데 있어 반박이 불가능한 완벽한 근거를 제공하며, 공정함을 바로세울 수 있게 한다. 소설에서는 이를 "공정함은 사회적 계약의 필수 요소이며, 진실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공정한 결론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라고 서술한다. 이 때 라이프로그는 '진실' 을 가장 명명백백히 밝혀줄 수 있는 도구가 된다. 그러나 작가는 리멤과 라이프로그를 사용한 진실의 추구가 언제나 그 본질적 선함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참담한 실패로 끝난 휴가를 누가 처음에 가자고 했는지 아는 게 정말 중요할까?

부부 중 어느 쪽이 상대의 부탁을 더 잘 잊어버리는지 꼭 알아야할까?

 

이 때부터 독자는 '완벽한 기억을 가진 인간은 어떤 존재가 될까?'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리멤과 라이프로그로 구성된 완벽한 기억은 인간의 기억에 존재하는 두 가지 문제를 완벽히 제거한다. 그 중 하나는 '망각'이고, 다른 하나는 '왜곡'이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용서할 수 있으려면, 그 전에 어느 정도 망각을 해야 한다. 과거의 심적 고통을 더 이상 생생하게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을 유발한 행위를 용서하기도 더 쉬워지고, 그 결과 해당 기억 자체가 덜 중요해지는 식으로 말이다. 과거의 당신을 격분케 했던 악행도 반추의 거울에 비춰 보면 용서할 만한 것으로 보이는 현상의 이면에는 바로 이런 심리적 피드백 고리가 존재한다. 
...
삭제 불가능한 동영상을 통해 과거에 있었던 악행의 모든 세부를 고착시켜버림으로써, 용서의 전제 조건인 기억의 연화를 원천 봉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서로를 향해 악담을 퍼붓던 과거의 체험을 생생하게 되살릴 수 있었다면, 우리가 느꼈던 분노 또한 고스란히 남아 관계를 복구할 기회가 아예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 대목에 이르렀을 때, 마침 나는 비슷한 류의 문제로[각주:5] 거의 일주일을 넘도록 밤잠을 설쳐가며 골머리를 앓고 있던 시기였다. 오래도록 그렇게 바라던 앙갚음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드디어 왔는데, 정작 내 손에 칼자루가 쥐어지니 과연 그렇게 해도 될 지 확신이 서지 않아 고민을 하고 있었다. 오래전의 나는 분명 하루하루가 죽고 싶을만큼 괴로웠고, 언젠가 그 사람이 후회하도록 해주겠노라 굳게 다짐했었던 그 때의 굵직한 감정과 사건들은 아직도 기억이 나지만, 리멤과 라이프로그가 없는 불완전한 기억 능력을 가진 나는 과거의 심적 고통이 더 이상 그때만큼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기억 자체가 덜 중요해져 정작 칼자루를 휘두를 필요가 있는지 되묻게 되는 것이었다. 당시에 힘들었다는 것은 과거의 '사실'로서만 존재할 뿐, 그때의 분노와 억울함이 지금의 나에게 동화되지 못했다. 나의 기억이 연화된 것이다. 

 

책에서는 이것이 리멤과 라이프로그를 가지지 않은 인간의 불완전한 기억능력의 순기능이라고 했지만, 오히려 나는 내 기억의 불완전함에 화가 났다. 용서하고 싶지 않았고, 그때의 감정이 한톨도 틀림없이 지금까지 유지되어 망설임 없이 그때 다짐했던 것을 실행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할 수만 있다면 당시의 장면을 다시 돌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몇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그 장면을 단 몇분이라도 다시 돌려볼 수만 있다면 그때의 감정이 다시 기억이 날 것 같은데. 왜 나는 녹음조차 해 놓지 않았는지, 왜 나는 당시에 일기조차 쓰지 않았는지를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몇년이나 지난 카톡을 다시 끄집어내 찾아보고, 그의 악행과 당시의 내 감정을 다시 복원시키고자 며칠이나 발버둥쳤다. 이 불안하던 시기에 접한 이 작품은 나의 머릿속을 장악해서 한동안 리멤과 라이프로그가 없는 현실을 원망하게 만들었다. 

 

 

소설에서 지적한 두 번째 자연기억의 문제인 '왜곡'은, 리멤을 처음 사용한 남성이 자신의 과거를 돌려보았을 때, 자신이 지금까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던 것이 사실은 왜곡된 기억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보여준다. 남성은 딸과 다투던 끝에 딸에게 들었던 심한 말을 평생 잊지 못하고 마음 한구석에 품어둔 채 살아왔으나, 리멤을 통해 사실은 그 말을 딸이 아니라 본인이 내뱉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단어들은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니콜이 아니었다. 나였다. 처음엔 가짜라고 생각했다. 니콜이 원래 영상을 편집해서 자기가 한 대사를 내 것으로 바꿔치기했다고 생각했다. 리멤에게 저작권 워터마크를 확인하라고 지시하자 리멤은 이것이 무수정 동영상이라고 답했다. 
...
설령 내가 아무리 결점많고 불완전한 인간이라 해도, 자식에게 그런 말을 내뱉는 종류의 아버지였던 적은 없었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방금 본 디지털 동영상은 내가 바로 그런 종류의 아버지였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한층 더 충격적인 것은 그 오랜 세월 동안 내가 나 자신에게 진실을 성공적으로 숨겨왔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내 기억은 정확한 것이 맞는것일까? 나는 내 기억에만 의존한 채 앙갚음을 해도 되는 것인가? 내 기억이 왜곡되지 않은 것이라는 증거가 필요했다. 그가 정말로 나에게 악행을 저질렀고, 지금의 내가 이렇게 할수밖에 없다는 합리화가 필요했던 것 같다. 칼자루를 휘둘러 남을 해하려고 하면서도, 나의 행동은 정당하다는 객관적이고 확실한 증거와 확신이 너무나도 가지고 싶었다. 안그래도 기억과 분노가 희미해진 판국에, 남아있는 기억이 왜곡되지 않은 진실이라는 것이 증명되기를 바랐다. 나는 정말 무언가에라도 매달리듯, 당시의 나를 알던 이들에게 몇달만에 연락을 해 내 기억이 맞는지를 확인받을 정도로 그것이 간절했다.

 

결과적으로 소설은 리멤과 라이프로그가 인간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옴팔로스

오늘날의 과학은 창조설에 상반되는 단서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발견되고 연구되어 왔지만, 이 단편에서는 만약 창조설이 사실임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발견된다면, 나아가 지구가 창조의 중심이 아니라면 지구는 어떤 모습일 것인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나무는 매 년 나이테를 하나씩 쌓아가고, 그 나이테는 나무기둥의 테두리부터 중심까지 차곡차곡 겹쳐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지금으로부터 8912년 전에 형성된 모든 나무화석의 중심에는 둥글고 아무 무늬도 없는 등질의 목심만이 존재한다. 이 태초의 나무들은 묘목에서부터 큰 나무로 자라난 것이 아니라 신에 의해 직접 창조된 나무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작품 속에서는 배꼽이 없는 인간 미라, 선이 없는 전복껍질등이 창조설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증거들로 등장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고고학자로, 이와 같은 과학적 탐구를 통해 신이 우리를 창조한 목적을 발견하고, 신에게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신을 섬기고자 하는 독실한 신자로 나타난다. 

 

그러던 중, 한 논문이 발표되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창조의 중심이 아니며, 지구 크기의 또다른 행성이 존재하고 그 행성이 모든 우주의 중심임을 증명해낸다. 나아가 저자는 그곳에 생명체가 살고 있고, 그들이야말로 신이 이 우주를 창조한 이유일거라는 가설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 지구는 주된 창조를 위한 연습으로 시행된 실험 내지는 시험으로 생겨났거나, 혹은 주된 창조과정에서 생겨난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으로 인해 생겨났다는 것이다.

 

독실한 신자였던 주인공은 지구의 피조물들이 신이 의도를 가지고 만든 것이 아닐 거라는 생각에 방황한다. 신이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인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는 곧 그것을 이겨내고, 비로소 진정한 자유의지를 가지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신이 자신에게 아무런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곧, 자신이 성취감이 신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닌, 온전히 자신의 내부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가 처음부터 혼자였다면, 혼자임에도 불구하고 성공했다는 사실은 우리의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우리 인간은 '왜'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떻게' 라는 질문의 해답을 계속 탐구하겠습니다.

이런 탐구야말로 제가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당신이 저를 위해 그것을 선택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제가 저 스스로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과학의 탐구를 통해 신을 섬기던 독실한 과학자가, 과학적 발견을 통해 신에게 버림받고(정확히는 처음부터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던 것), 그로 인해 마주한 존재의 이유에 대한 방황을 다시 과학의 탐구를 통해 이겨내며, 자신의 존재의 목적과 의도를 스스로 설립해나가는 자유의지를 보여주는 과정이 아이러니했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앞서 언급했던 형식을 마찬가지로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는 소설이다. (1) 과학적으로 거슬림이 없는, 그러나 아직 현실에는 없는 작은 설정 하나와 (2)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일화들, 그리고 소설을 읽은 후에 (3) 그렇다면 나는? 하고 대입해 생각해보게끔 하는 여운까지. 

 

이 작품에서 가정한 것은 '프리즘' 이라는 장치인데, 정확히 묘사되진 않았지만 나는 노트북처럼 생겼다고 상상했다.

 

프리즘에는 빨간색과 파란색 두 개의 LED 등이 달려 있는데, 프리즘이 작동하면, 장치 내부에서 양자 측정이 이루어져 동일한 개연성을 가진(50:50) 두 개의 결과 중 하나가 나온다. 한 쪽 결과가 나오면 빨간 등이 켜지고, 다른 쪽 결과가 나오면 파란 등이 켜지는 식이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프리즘은 새로 분기된 두 개의 시간선을 만들어내고, 이 두 평행우주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해준다.

최신 프리즘의 용량은 1기가바이트였다. 텍스트만 교환한다면 평생 쓸 수 있을 정도의 용량이지만, 모든 소비자들이 텍스트 교환에만 만족하는 것은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실시간 대화를 원했다. 가급적이면 영상을 곁들여서 말이다. 저해상도 저프레임률 영상만으로도 프리즘의 용량은 불과 몇시간이면 소진된다. 

 

만약 내가 새 프리즘을 구매해서 처음 가동시키면, 내 프리즘에는 빨간색과 파란색의 LED 중 하나가 켜지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우주는 두 개로 분기되어, 두 개의 시간선을 가지게 되고 프리즘은 그 두 평행우주 사이에서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 만약 내 프리즘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면, 나의 반대쪽 우주에는 파란 불이 들어왔을 것이다. 두 우주는 그 직전까지는 정확히 동일한 과거를 가지지만, 그때부터는 각자 다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프리즘에 의해 연결된 두 갈래의 세계는 양자 측정의 결과가 상이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완벽하게 동일한 상태로 시작된다. 만약 누군가 중대한 결정을 양자 측정에 맡기려고 결심한다면("파란 LED등이 켜지면 폭탄을 터트리고, 아니라면 해체할거야") 두 세계는 명백히 다른 형태로 분기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이런 측정에 입각해 행동하지 않는다면, 이 두 세계는 어느 정도까지 분기할까? 단 하나의 양자적 사건이, 그 자체로, 두 갈래로 분기한 세계들 사이의 뚜렷한 변화로 이어질 수 있을까?

최초의 교란은 프리즘 활성화가 야기하는 산소분자들의 상이한 충돌에 해당하며, 그 결과 한달 이내에, 두 세계의 기상 패턴은 차이를 보인다. 누구의 노력도 없이, 두 갈래 우주는 전 세계적인 규모로 뚜렷이 분기했다.

초미세한 차이 하나만으로도, 배란된 난자와 결합하는 정자는 다른 정자로 바뀔 수 있다. 결과적으로, 두 갈래의 우주에서 기상 패턴이 두드러진 차이를 보이는 순간, 모든 수정은 영향을 받는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각 갈래의 우주에서 다른 아이를 낳는다. 

 

설정을 읽으면서 가질 수 있는 작은 의문점까지도 작가가 이미 다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상상에 기반해 매우 세밀한 설정을 완성해두었다. 프리즘으로 우주의 시간축이 두 개로 나뉘는 것은 컴공의 입장에서는 fork() 처럼 느껴졌는데, 두 개가 된 프로세스는 추가적인 작업을 하지 않는 한 똑같이 동작하기 때문에 반대쪽 우주와 통신을 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과연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질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양자적 사건만으로 몇 달만에 세상이 바뀔 수 있다고 작가는 주장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이러한 프리즘과 평행우주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여러 인물들의 일화들이 '프리즘 중독자 모임' 을 중심으로 서술된다. 다양한 일화들이 존재하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그보다 더 많은 있을법한 일화들이 머릿속에 끊임없이 떠오르게 되는 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었다. 

 

사람들은 프리즘을 다양한 용도로 사용한다. 중요한 결정의 순간, 내가 고르지 않았던 선택지의 결과가 과연 어땠을 것인지를 찾고싶어하고, 그쪽보다 나의 현재가 더 행복하기를 바라며, 혹여라도 그쪽이 더 행복하지는 않을까 두려워한다. 자신의 결정이 정답이 맞는지 채점을 해 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당장 떠오르는 채점을 해 보고 싶은 결정들이 많다. 다른 대학을 지원했더라면 어땠을까, 재수를 했다면? 대학원을 오지 않고 취업을 했다면 지금 어떻게 살고있을까? 만약 그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볼 기회가 있다면, 수많은 평행우주 중 내가 찾는 평행자아와 대화를 할 수가 있다면 열어 봐야 할까? 만약 내 결정이 오답이었다는 걸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다면 나는 견딜 수 있을까. 

 

작품에서는 평행자아와 대화를 한 후로, 자신의 평행자아를 향한 부러움과 질투심으로 괴로워하는 사례도 소개되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어요. 다른 사람들 온라인 스토어에서 장신구가 많이 팔리는 걸 봤을 때는 그런 기분이 아니었거든요. 내 평행자아한테만 부러움을 느꼈던 거에요. 

난 내가 천성적으로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너도 마찬가지고. 우린 다른사람들이 가진 걸 언제나 부러워하진 않아. 하지만 프리즘을 통해 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잖아. 바로 너잖아. 그러니 어떻게 그들이 가진 걸 네가 가져야 한다고 느끼지 않을 수가 있겠어. 

 

너무나도 설득력있는 서사였다. 나와 가까운 사람일수록, 부러운 마음은 더 크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얼마나 더 잘 되든 크게 감흥이 없지만, 친구가 산 주식이 오르면 부럽기 마련이다. 더욱이 그것이 나 자신이라면, 심지어 지금의 나와 평행자아 사이의 차이를 만든 것이 오직 프리즘을 시작했던 사건 그 뿐이라면, 어떻게 질투와 후회를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프리즘으로 인한 또다른 화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선택이 무의미해진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에 사로잡혔다는 것이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는 선택을 했더라도, 그를 용서하지 않는 선택을 하는 평행우주가 어딘가 또 존재한다면 결국 나의 선행과 희생이 상쇄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기인된 것이다. 그러나 이에 관해 작가가 서술한 의견이 굉장히 흥미로웠는데, 내가 선한 일을 할 때마다, 나는 스스로를 다음번에도 선한 일을 할 가능성이 많은 인물로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동물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강아지를 걷어차는 평행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내가 내리는 모든 결정은 내 성격의 일부가 되고, 나라는 사람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선택은 미래에 분기될 세계들에 영향을 끼칠 것이고, 작가는 내가 선한 선택을 하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미래에 이기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이 줄어든다고 주장한다.

 

 

 

굳이 고민하지 않고 쉽게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그 사람들이 쉽게 그럴 수 있는 것은 선하게 행동하려는 작은 선택을 예전에도 여러 번 했기 때문일 거에요.

 


 

오랜만의 독서였는데 각 단편마다 책을 읽는 시간보다 읽고 난 후에 혼자 생각에 잠긴 시간이 더 길었던 묘한 경험이었다. 

나에겐 리멤이 없으니, 불완전한 자연기억을 글로 기록해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와 시간축을 넘어 소통할 수 있는 프리즘을 열어본다.

  1. (ex) 더 킹... 어려우면 차라리 과학적으로 설명을 하려고 들지를 말라고!! [본문으로]
  2. 왠지 링크를 저렇게 걸어야 될거같다ㅋㅋㅋㅋ [본문으로]
  3. 행복했던 순간을 찾거나, 알레르기 반응의 원인을 추적한다거나 등등 [본문으로]
  4. 물론 스마트렌즈나 스마트글래스의 착용이 필요하다 [본문으로]
  5. persona-p.tistory.com/10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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