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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아서 요즘 넷플릭스를 보는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

얼핏 보면 모순적인 말처럼 보일수있지만, 논문에 들어갈 그래프들을 뽑으려면 실험을 잔뜩 돌려야 하는데 정작 실험이 도는 중간중간에는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넷플릭스를 틀어놓고 실험을 돌리고 있다. 하루에 거의 20시간씩 미친듯이 시간을 쏟아부으며 막판 스퍼트 작업을 하고있어서 그만큼 넷플릭스를 틀어놓는 시간도 길어졌다.

 

가장 최근에 본 건 새로 공개된 연상호감독의 지옥 6부작이다. 작품자체가 엄청나게 훌륭하다거나 마음에 드는건 아니지만, '여러 반론을 기대한다' 는 감독의 말처럼, 많은 생각이 꼬리를 물고 따라오는 작품이었다.

 

 


뜬금없지만 MBTI

F 와 T의 차이로 꼽히는 것 중 하나가, F 는 '감정' 에 더 공감하고, 'T' 는 '상황' 에 더 공감한다는 점이 있다. MBTI에 과몰입하고 싶진 않지만, 나는 극단적 T 라서 이 부분만큼은 T로 대표되는 특성들이 내 성향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대표적으로, 나는 친구들의 고민상담을 정말 자주 해 주는 편이지만, 감정의 공감보다는 상황의 이해와 문제의 해결이 항상 우선이다. 상대방의 감정을 무시한다거나 애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게 내 나름대로 그 사람을 향한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인 것이다. '그래 너가 많이 힘들었겠구나' 하고 내가 공감을 열심히 해줄지언정 그를 괴롭히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결국 다시 불행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인 것이고, 그렇기에 어떻게든 그를 힘들게 하는 문제자체를 해결해 주고 싶은 마음에서 오는 T 가 할 수 있는 따뜻한 노력이다.

 

얘기가 잠깐 벗어났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등장인물들의 '감정' 보다는 영화에서 주어진 '갈등 상황'이나 '설정', 혹은 '행동의 동기'에 집중을 하는 편이라는 거다. 인물이 저 상황에서 저 선택을 하는 것이 과연 최선이었는지, 왜 그런 선택으르 했는지,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만약 다른 선택을 했다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을지 하는 것들을 보는 내내 고민하고, 작품이 끝난 후에도 그 고민을 오래 붙들고 있는다.

 

예를들어, 오징어 게임을 본 후에는 난 내내 각 게임의 필승법들을 고민했다. 기훈이 달고나를 핥아 어려운 모양조차 통과한 것처럼, 다른 게임들에서는 필승법이 없었을까 하는 고민 말이다. 징검다리 게임에서는 후드집업 안에 운동화를 넣고 묶어 유리를 한 장씩 깨면서 전진하면 되지 않았을까, 수학선생님은 죽기 직전의 타이밍에 살 확률을 계산할 게 아니라 첫번째 사람이 출발하기 전에 계산해보았어야 하지 않을까. 생존확률이 5%도 안되는 초반의 6명은 사실상 출발할 이유가 없었다. 딱 두 명만 더 설득해서 게임을 종료시켰어야 했다. 당신들은 어차피 무조건 죽을것이고 목숨바쳐 뒷사람들 좋은일만 시키는 거라고 말이다. 저거 찍어서 맞출자신이 있으면 로또를 사야지.

 

 


이 아래는 지옥 스포가 있습니다


 

다시 지옥으로,

서론이 길었는데, 다시 지옥으로 주제를 가지고 와서, 내가 지옥을 보면서 했던 고찰들을 적어본다.

 

 


지옥이란?

드라마 지옥에서의 고지는 어느날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 "너는 몇월 며칠 몇시 몇분에 죽는다. 그리고 지옥에 간다." 라고 하는 일종의 사망예고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이 되면, 지옥의 사자가 나타나 대상자를 피떡이 되도록 패주고 마지막으로 직접 화장까지 시켜준다. 이렇게 사자가 죄인을 직접 지옥으로 데려가는 것을 작품 내에서는 시연이라고 한다. 

 

사실 드라마를 보면서 이 지옥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여러번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먼저 작품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사용되는 의미의 지옥은, 죄인들이 지옥의 사자들에게 훈제된 후 가게 되는[각주:1], 그러나 아직은 아무도 모르는 사후세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초반 1~3화에서 작품이 보여준 지옥의 진짜 의미는, 고지를 받은 순간부터 시연을 받아 사망하는 순간까지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고지를 받는 순간부터 대상자에게는 지옥이 시작되었다. 시연을 기다리는 내내, 앞으로 다가올 고통과 죽음을 상상하며 공포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죄인들의 모습은 이미 지옥에 살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카페에 앉아 식은땀을 흘리며 불안해하던  1호 죄인의 모습, 고지를 받고 시연의 생중계를 준비하는 내내 하루하루 눈에 보이게 초췌해지던 박정자씨의 모습은 그 자체로 지옥같아 보였다.

만약 천사가 단순히 며칠 후 '죽을' 것인가를 알려준다면, 어쩌면 사람들은 죽기 전까지의 그 시간을 꼭 그렇게까지 괴롭게 보내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교통사고로 언제 갑자기 준비 없이 죽을 지 모르는 세상에서, 죽기 전까지 삶을 정리할 시간을 주는 건 오히려 신의 배려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잔혹한 시연 때문에, 그 시간은 그저 지옥이 되어버린다.

 

후반의 4~6화에서는 새진리회가 장악해버린 세상이 곧 지옥인 듯 보였다. 새진리회에 맞서는 사람은 화살촉에 의해 잔인하게 보복을 당하고, 법도 재판도 없이 납득할 수 없는 고지 하나 만으로 세상에서 격리당하는 죄인과, 연좌제로 함께 고통받는 가족들까지. 조용히 홀로 죽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인권, 아니 대부분의 동물들이 가지는 그 권리마저 박탈당한 채 누구에게도 연민과 위로를 받지 못하는 죽음들이 내내 강조되었다. 


내가 고지를 받는다면? 피할수 있는가?

이 드라마를 보다보면 자연스럽게 드는 첫 번째 의문은 '내가 고지를 받는다면?' 이 될 것이다. 죄인에게 고지가 내려지는 듯 했던 1-3화를 보는 동안에는 '그래 죄 짓지 말고 살아야지' 생각하겠지만, 결국 그냥 랜덤함수라는 게 밝혀진 후에는 과연 나는 어디까지 저항해 볼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만약 신이 정말 인간을 지옥으로 데려가는 것 그 자체만이 목적이었다면, 왜 고지의 순간부터 지옥의 사자가 등장하기 전까지 마지막 시간을 주는 것일까? 그냥 갑자기 두둥 등장해서 데리고 가면 될 것을 말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차마 체념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시연이 기다리고 있는 이상, 이 시간을 마지막으로 삶을 정리하는 의미로 받아들이긴 어렵다.  그보단 오히려, 지옥의 사자를 기다리는 시간동안 공포에 떠는 인간을 지켜보고 싶어하는 신의 악취미에 더 가까워보였다. 곤충이나 개구리같은 걸 잡아놓고 도망치려고 발버둥 치는 걸 지켜보면서 실컷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혹은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디 한 번 주어진 시간동안 해보는 데까지 해 보라는 의미로 말이다. 

 

지옥의 사자는 허공을 가르고 등장하고 사라지는 초월적 존재지만, 물리법칙이 적용되는 대상으로 보였다. 자동차를 때려부수고, 부딪치면 찌그러지고, 때리면 반응하는 장면이 극 중에 종종 등장했기 때문이다. 21세기 현대 과학기술을 퍼붓는다면 과연 저 괴물들을 이길 수 있을 지 없을 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고지를 받았다면 하는데까지 반격은 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나 내가 고지를 받는다고 한 들 우리나라 정부가 나서서 군대를 투입해 날 보호해줄리는 없고... 더욱이 경찰이 총을 꺼내 쏘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다. 물 속에 들어가있으면 되려나? 하는 생각은 4화에서 보기 좋게 반박당해버렸고, 밀실이나 지하벙커같은 곳을 찾더라도 허공에서 등장하는 사자를 피할 수는 없는 것 같았다. 그 시간에 비행기에 타서 하늘위에 있다면? 허공에서 등장한 괴물들이 그 비행기를 추락시켜버릴 것 같다. 고민 끝에 내가 내린 최선의 결론은, 당장 가까운 비행기를 타고 백악관 근처로 가서.. 시연 시간이 되었을 때 백악관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거다. 백악관은 무장한 경비가 삼엄하니까... 괴물이 나오면 뭐진 몰라도 일단 공격을 좀 하지 않을까? 

 


지옥이 rand() 라는걸 누구보다 먼저 알아냈으나 그 사실을 묻고 종교를 만든 정진수의장의 행동과 결정은 옳았는가?

사실 4-6화를 보다 보면 괴물보다 새진리회가 더 끔찍하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그 모든 일의 원흉, 정진수 의장은 나쁜놈인가 하는 고민을 해 보았다. 그러나 고민을 거듭할수록, 나는 정진수와 정확히 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지와 시연이 죄인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자연재해와 같은 것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과연 사람들은 그것을 납득할 수 있을까? 당장 언제든지 이유 없이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는 삶이 부질없게 느껴지게 할 것이고, 고지를 받은 후 시연 전까지 혼자죽기 억울해 각종 범죄나 테러를 일으키려는 사람이 등장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정진수와 새진리회가 아니더라도, 분명 수많은 유사 종교들이 제각각의 이유를 들고 등장했을 것이다. 그럴 경우, 먼저 깃발꼽고 가장 먼저 이 사태를 분석하고 가장 널리 교리를 퍼트리는 쪽이 제일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가장 먼저 설명하는 사람은, 단지 고지와 시연의 존재만 증명시켜주면 그 뒤의 교리나 이유, 신의 뜻과 같은 것은 무엇을 가져다 붙이더라도 사람들을 홀리기 쉽다. 정진수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정진수는 고지와 시연의 존재만을 증명하였고, 그 현상에 '너희는 더 정의로워야 한다' 는 신의 뜻이 담겨있다는 것은 증명하지 않았으나, 모두 그것을 사실로 믿어버렸다. 그러나 후발주자들은 다르다. 앞서 등장한 종교의 모순을 지적해야하고, 수많은 반례와 더 잘 정립된 교리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아야 하는데,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맹목적인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종교에는 더더욱 어렵다. 깊은 고찰과 탐구는 해본적도, 관심도 없고, 그저 권력과 돈에만 눈이 먼 사이비종교들이 생겨나기 전에[각주:2] , 그나마 정의롭고 선한 목적에 기반을 둔 종교가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하는 것은 어쩌면 그 상황에서 내릴 수 있는 가장 나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기에 나는 정진수의장의 결정이 본질적으로는 깊은 숙고끝에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나는 그가 더 빈틈없이 잘 정립된 교리를 만들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설계한 세상에 버그가 없는지를, 20년이나 되는 시간동안 끊임없이 생각하고 검증해 보았어야 한다. 새진리회의 의도를 곡해하고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는 화살촉과 같은 단체가 생겨났을 때, 그는 더 적극적으로 그들을 제지하고 옳은 길로 인도했어야 한다.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건 새진리회, 그리고 그 꼭대기에 있는 정진수 뿐이니 말이다.

 

정진수가 설계한 세상은 랜덤함수를 피해간 사람들을 위한 세상이다. 범죄율이 더 낮고, 좀 더 정의로운, 찢겨죽을지 모르는 공포에 모두가 죄를 짓지 않고 더 바르게 살기위해 노력하는 사회.  그러나 정진수는 고지를 받은 사람들이 아무 죄없는 사람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위한 exception handler 는 교리에 담지 않았다. 이왕 구실과 이유를 붙이고 스토리와 교리를 만들 거라면, 불쌍하게 rand()에 당첨된 사람들을 위한 교리 또한 만들었어야 했다. 우리는 모두 신의 자식이니 죄인의 가족에게 연좌제를 적용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시연을 받고 지옥으로 간 사람은 이미 죗값을 치뤘으니 장례를 지낼 수 있게 한다던지 하는 것들 말이다.

 

아니면 그냥 이 현상의 원인을 개개인으로 한정지을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지은 죄를 신이 랜덤으로 인간에게 묻고 있다는 식의 설명을 할 수도 있겠다. 우리가 환경파괴를 너무 심하게 해서, 신이 경고차원으로 인간에게 지구가 겪는 고통을 똑같이 보여주는 거다. 선택된 사람에게 특별히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이 현상이 줄어들거나 사라질 것이다, 하는 식의 교리를 만든다면, 사회를 좀 더 바른 방향으로 이끌면서 피해자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현실에서의 고지

드라마를 보면서, 사실 이미 우리가 사는 현실에도 고지와 시연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했다. 작품 속 혜진의 엄마도 비슷한 말을 했는데, 암이나 불치병으로 시한부를 선고받은 사람이 살고있는 세상이 이 작품 속 세상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둘 모두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전달받고, 두려움과 공포로 그 시간을 견디며, 육체적 고통이 수반된다.

 

시한부 인생, 혹은 암과 같은 큰 병을 선고 받고 나면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이다.

"내가 뭘 잘못했는가?" 그리고 그 뒤는 "왜 나인가?" 하는 질문이 따라오겠지.

이 두 질문은 모두 이 작품에서 고지를 받은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을 보면서 닥터앤닥터의 한 에피소드가 자꾸 생각났다.

 

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titleId=732955&no=194&weekday=sun 

 

닥터앤닥터 육아일기 - 194. 확진 1

194. 확진 1

comic.naver.com

 

 

 

 

  1. 아니 사실 진짜 가는건지 뭔지도 모르겠지만 [본문으로]
  2. 2대 의장과 같은 사람 말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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