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일기] 프로불편러 in Switzerland 🇨🇭
스위스에 도착한 지 약 3주가 지났다.
이 한달이 채 안되는 시간동안, 새 환경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생각보다 너무 많은 스트레스가 몰아쳤다.
코로나가 터지고 자택근무를 해 온 지난 일년은, 어제와 오늘이 다를 바 없고, 한달전과 이번달이 다르지 않은 잔잔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 곳에 도착한 후로는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낯설고 그렇기에 많은 것이 어렵다.
나름 학부생 때 여름인턴으로 10주정도 지냈던 나라인지라 어느정도 스위스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유학을 준비하던 꿈나무였던 시절 유럽으로 온 첫 여름인턴의 기억이 너무도 찬란하고 행복했기 때문에, 내 기억속 스위스는 그저 물가 비싸고 아름다운 선진국 정도의 느낌으로 남아있었다. 낯선 행정처리들을 알아보는 과정조차도 당시에는 모두 신선한 경험이었고, 마치 벌써 유학생이 된 것만 같아서 신기하고 뿌듯한 일들이었지, 그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시 찾은 스위스는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는데, 3년 동안 내가 많이 변했나보다.
이 글은 스위스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내가 느꼈던 수많은 투덜거림을 프로불편러의 입장에서 정리한 글이다.
📮 우편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걸까?
바야흐로 디지털의 시대다. 아날로그로 편지를 주고 받는 것보다 카카오톡이나 SNS, 이메일로 소통하는 것이 더욱 편리하다는 것을 이미 너무도 잘 알고있다. 그런데 이 나라는 우편을 너무 좋아한다.
모든 중요한 서류는 전부 우편이 기본이다.
첫 시작은 원룸 계약이었다.
입주 당일, 계약서에 사인을 한 후 열쇠는 그 자리에서 받았지만, 사인한 계약서는 우편으로 보내겠다고 했다. 아니 왜? 내가 이렇게 눈 앞에 있는데? 그거 그냥 내 손에 쥐어주면 안되는 거야? 그렇게 내 눈앞에 있던 그 계약서는 이틀 후 곱게 접혀 우체통으로 배송이 왔다.
두 번째는 교통카드. 매달 무려 55CHF 을 내고 대중교통 정기권을[각주:1] 끊었는데, 오피스에 직접 방문을 해서 신청을 했음에도 그 자리에서는 2주짜리 임시 탑승권만 발급을 해 주고 실물카드는 우편으로 배송을 보내주었다. 엄청 큰 오피스인데! 그 자리에서 그냥 쓱 카드 발급이 왜 안되는걸까?! 별 특별할것도 없이 흑백사진 하나 덩그러니 들어간 카드인데!
그 뒤로도 3주동안 정말 많은 우편들을 받았다.
유심 배송도 우편으로 오고, 스위스 건강 보험 가입을 하고 증서를 제출하라는 통지서도, 거주허가증을 신청하러 오라는 안내문도 전부 우편으로 왔다.
심지어 저 거주허가증을 신청하러 오라는 안내문은 온라인에서 거주허가증을 신청하고 일주일쯤 뒤에 받았는데, 열어보면 그냥 QR 코드가 인쇄되어 있다. QR코드를 스캔하면 사이트가 하나 뜨는데, 그 페이지를 통해 방문을 예약할 수 있다.. 아니 처음부터 사이트에서 그냥 바로 예약할 수 있게 해주면 안되는건가?
거주허가증 하나 신청하는데 필요한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온라인으로 미리 신청하고 (2) 편지기다려서 (3) 편지에 있는 QR코드로 방문예약잡고 (4) 방문하고 (5) 다시 우편기다리고 (6) 우편들고 방문해서 지문등록하고 (7) 최종 거주허가증은 우편으로 발급 (8) 결제 인보이스도 우편으로 배송
이렇게 여덟 스텝이나 필요한 일인지... 온라인으로 신청해서 받는건 바라지도 않고, 그냥 방문해서 그 자리에서 쾅쾅 하고 바로 발급해 줄 수는 없는건지... 한국인은 답답해 죽는다.
그 중 제일 충격적이었던 건, 본인확인 숫자 코드 6자리도 우편으로 왔던 die post 회원가입이었다.
🕸 방충망 왜 없어?
도대체 방충망 왜 없는거야ㅜㅜㅜ 벌레 없는 청정 국가도 아니고, 살면서 한번도 본 적 없는 온갖 특이한 벌레들이 다 출몰하는데 스위스엔 정말 그 어떤 건물에도 방충망이 없다. 거미도 사이즈별로 다양해서, 개미처럼 작은 놈도 있는가하면, 손바닥만하게 큰 거미도 자주 보인다..
방충망도 없는데 이 나라 사람들은 다들 창문을 활짝 잘도 열어놓고 산다. 이게 그 자연과 함께하는 삶 그런건가?
그나마 스위스 2회차라 이럴 걸 예상하고 한국에서 사 온 방충망을 셀프 시공했는데, 그래도 대체 어디서 들어오는지 집에서 자꾸 벌레가 보인다. 다행히 바선생이나 개미같은 집벌레는 아닌데, 이번주에만 엄청나게 큰 거미 한 마리와 지네처럼 생긴 작은 벌레가 등장했다. 집 청소도 제대로 했고, 방충망까지 잘 달아놨는데, 그조차 불안해서 하루에 창문을 몇시간 열지도 못하는데, 도대체 어디서 자꾸 나타나는 건지 너무 스트레스 받는다.. 집에서 벌레가 두번이나 나오니까, 팔이나 다리가 살짝만 간지러워도 화들짝 놀라게 되고, 책상에 앉아서도 침대에 누워서도 긴장을 놓지 못하고 자꾸 움츠리고 있게 된다. 벌레가 등장했던 벽은 볼 때마다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리플레이..
으 제발 그만 좀 나와라..
☀️ 에어컨 왜 없어?
스위스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만년설과 알프스긴 하지만, 여기도 사계절이 있는 나라다. 심지어 요즘 날씨는 한국보다 더 덥다.
어제 오늘 둘 다 벌써 31도를 찍었다. 다행히 습하지는 않지만 햇빛도 너무 뜨겁고, 밤 9시까지도 해가 떠 있어서 하루종일 너무 더운데 건물들에 에어컨이 없다.. 아니 에어컨은 커녕 선풍기도 잘 없다.
이 난관 역시 스위스 2회차!의 짬을 발휘해, 한국에서 올 때 손선풍기와 탁상용 선풍기를 두 개나 사왔다.
집에서는 일할때든 잘 때든 탁상용 선풍기를 항상 틀어두고 사용하고 있고, 집을 나가는 순간부터 연구실에서는 손선풍기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그런데 지하철에서나 정류장에서 손선풍기를 쐬고 있으면 주변의 시선이 자꾸 느껴진다.. 30억짜리 손목시계는 잘도 만드는 나라가 왜 고작 이 손선풍기하나가 보급이 안된걸까? 아무리봐도 사람들의 수요는 확실한 거 같은데.
스위스에서 손선풍기 장사하면 부자될 거 같다는 생각을 3년전에도 했는데 3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하다는 게 신기하다.
🚬 길에서 담배피는 게 합법인가??
우리나라에서도 길에서 담배피는 사람이 간혹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구석진 곳에서 피는게 일반적인데, 여긴 사람이 바글바글한 시내 거리 한가운데에서 걸으며 담배피는 사람이 너무 많다. 뒤에서 따라 걷다보면 그 담배연기를 다 들이마시게 되는데, 다들 딱히 불편해하는 기색도 없다. 스위스의 청정 선진국 이미지와 너무 괴리감이 커서 특히 더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 마트 왜 이렇게 빨리 닫아..?
워라밸을 중시하는 선진국이라 그런가, 저녁 7시가 되면 모든 마트와 상점이 문을 닫는다. 연구실에서 집까지 대략 30분정도가 걸리니까, 만약 6시에 퇴근하면 집에 도착한 후에 장을 보러 나가기가 너무 빠듯하다. 정작 해는 9시는 되어야 지는데, 아직 해가 쨍쨍한 7시에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아버리니 퇴근 후에 아무것도 할 게 없다. 하다 못해 기차역에 있는 편의점 같은 것도 다 닫는다. 저녁을 사 먹을 수 없으니 집에서 먹을 저녁거리라도 사려면 5시에는 퇴근을 해야한다.
그런데 퇴근을 일찍 한다고 집에 와서 쉬는 게 아니라, 할 일의 양은 정해져 있으니, 집에 도착하고 불편한 책상앞에 앉아 허리를 혹사해가며 작은 노트북으로 일을 더 해야할 뿐이다.
심지어 토요일은 오후 6시면 온 도시가 셧다운. 그리고 그 셧다운은 일요일에 풀리는 게 아니라 월요일에 풀린다. 즉, 토요일 오후 6시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그냥 온 도시가 통째로 셧다운이다.
일요일에 집 밖을 나가면 마치 유령도시처럼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았고, 하루전까지만 해도 북적이던 거리에 사람이 없다.
평일에 퇴근 후에도, 그렇다고 주말에도 장을 볼 수가 없으니, 평일 낮에 따로 시간을 빼서 필요한 볼일들을 봐야 한다.
주말이 되면 잠깐이라도 쇼핑이든 산책이든 가고 싶은데 집 밖에 나가도 할 게 없다..
💸 물가 실화냐...
스위스 물가야 뭐 더 이상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냥 다 비싸다. 필요한 거 하나를 사더라도 으으 이걸 이 돈 주고 사야된다니 하는 생각때문에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는 받지 않아도 되었던 스트레스가 추가된다.
🇫🇷 Tu parles Anglais?
내가 있는 로잔은 기본적으로 프랑스어권이다 보니 학교밖에서는 모두 프랑스어를 쓴다. 이전에는 행정처리들을 딱히 할 게 없어서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는데, 이번에는 정착과정이 조금 더 복잡했다 보니 언어의 장벽으로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특히, 내가 사는 지역은 학교랑은 조금 떨어져있는 시내다 보니, 이 동네에는 영어를 전혀 못하는 사람도 은근 있다. 마트에서 찾는게 안보이면 직원을 붙잡고 질문을 하기도 쉽지 않고, 세제를 사고 싶어도 패키징마다 써 있는 알 수 없는 문장들 때문에 대충 아무거나 집어 사게 된다. 안내문을 볼 때도 항상 번역기를 켜고 봐야하고, 사이트를 접속할 때도 자동 번역기능을 항상 켜 두는 게 습관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 앞서 언급한 "우편" 특성이랑 조합되면 최악이 되는데, 3장짜리 프랑스어 안내문을 받으면 그렇게 난감할 수가 없다. OCR 로 해결해보려다가 잘 되지 않아서, 저런 편지를 받을 때마다 결국 하나하나 타이핑하고 번역기를 돌려서 읽고 있다..
유학생활 3년차에 이제 슬슬 영어가 익숙해지나 싶었더니, 다시 언어의 장벽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마트 셀프계산대나 무인 키오스크 같은 곳에서 영어가 나오면, 미국에서 한글을 발견했을 때보다 더 반갑다.
📦 그립다 아마존... 네이버쇼핑...
내 지난 2년동안의 미국생활은 정말로 아마존의 노예였다.
하루 이틀만에 조건 없는 무료 배송!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스무스한 무료 반품! 검색만 하면 뭐든 다 나오는 쇼핑 천국! 심지어 수시로 파격 할인도 자주 뜬다.
그런데 스위스는... 없다... EU 가 아니라서 아마존 배송도 안된다... galaxus 라는 스위스 사이트가 그나마 가장 많이 쓰이는 온라인 쇼핑몰인것 같은데, 아마존에 비하면 당연히 허접하기 짝이 없다ㅜㅜㅜ 택배를 주문하고 두근두근 기다리다가 도착한 택배를 뜯는 그 재미가 사라져버렸다.
🌎 쓰레기 처리 어려워...
이건 사실 그냥 노답 미국에 익숙해져서 생긴 문제지만. 스위스 분리수거 진짜 열심히 한다...
PET, 유리, 종이, 종량제 봉투 다 나눠서 버려야 되는데 종량제 봉투는 고작 쪼그만 10L 짜리가 한 장에 1200원이다. 너무 비싸...
대충 아무 비닐봉지에 몽땅 다 때려넣고 버렸던 미국에 살다가 다시 분리수거를 하려니 너무 귀찮다ㅜㅜㅜ
어차피 지구는 미국이 다 죽일건데... 심지어 스타벅스에서도 종이빨대 쓴다. 정작 스타벅스의 본고장 미국은 초록색 플라스틱 빨대 계속 쓰고있는데... 마트에서 파는 커피우유에 붙어있는 빨대도 종이빨대다.[각주:2]
음식물 쓰레기도 미국에서는 전부 싱크대에 윙윙 갈아버리거나 쓰레기봉투에 다 때려넣었는데, 여기서는 종량제 봉투에 버려야 한다. 종량제 봉투 제일 작은 10L 도 비싸서 아껴쓰는데.. 음식물을 거기에 섞어 버리니 냄새때문에 빨리 가져다 버려야해서 골칫거리다.
우와 쓰다보니까 불편한게 정말 끝도 없다.
나 3년전에는 여기서 어떻게 그렇게 행복하게 지냈지? 대단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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